공감공유의 맛깔나는 세상

<사례> '무조건전자'의 중국지사 사무실. 왕고집 회장이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손바닥 만한 계산기와 씨름을 하고 있다. 침묵의 10여분이 흐른 후 드디어 왕 회장이 입을 열었다.

"200억원으로 하시죠? 그 이상은 안 됩니다."

몇 년 전 중국에 대규모 공장을 지어 대기업에 납품하고 있는 무조건전자의 왕 회장은 홍콩에 새로운 공장을 지으려고 한다. 그 건설업체 선정을 위해 '일등만 건설사' 측과 마주 앉아 첫 가격 협상을 벌이고 있다.

"200억원으로 하려면 하고, 말려면 마세요. 중국 건설사는 훨씬 더 싸게 된다던데…. 내일까지 시간을 드리죠."

일방적 통보를 하고 자리를 뜨는 왕 회장. 일순 협상장 분위기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날 밤, 호텔에 모여 내부 회의를 시작한 일등만건설사. 최소 가격보다 20%나 낮게 부른 상대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가, 포기할 것인가. 섣불리 어떤 말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나본전 상무가 말을 꺼냈다.

"오늘 이 협상을 위해 저희 팀원들과 저는 지난 한 달 동안 새벽 1시 전에 집에 들어간 적이 없습니다. 이번 사업 수주를 확신하고, 다른 프로젝트는 모두 중단한 상황이에요. 무리를 해서라도 이번 협상은 타결시켰으면 좋겠습니다."

 일러스트=김의균 기자 egkim@chosun.com

치열한 준비 과정이 떠오른 듯 떨리는 목소리로 이야기하는 나 상무의 의견에 다들 동의하는 분위기다. 나 상무가 최종 제안서를 고치려 할 찰나 가만히 듣고만 있던 최고참 부사장이 입을 열었다.

"나 상무가 여러모로 고생한 것,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지금 조건으로 협상을 타결시킨다면 너무 손해가 큽니다. 마지노선이 250억원이라는 것은 수차례 시뮬레이션을 통해 검증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번 협상은 그만하고 한국으로 돌아갑시다."

평소 말 없는 카리스마로 유명한 최 부사장의 말에 나 상무도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인다. 기껏 노력한 일이 물거품이 되었다는 것에 실망하는 사람들의 등을 토닥이는 최 부사장.

그런데 최 부사장은 돌아오는 비행기에 오르기 직전까지 무조건전자 사람들에게 전화를 하며 작별 인사를 했다. "다 끝난 일인데 왜 저러지?" 다들 고개를 갸웃거렸다.

한국으로 돌아온 최 부사장은 다시 협상팀을 소집했다. 그리고 무조건전자와 관련된 각종 자료 수집을 지시했다. 그들이 해외 건설사와 접촉을 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도 입수했다.

최 부사장은 평소 친한 기자들과 점심 약속을 가졌다. 며칠 후 언론에 '무조건전자의 새 공장 건설사업을 중국 건설사가 수주할 것'이라는 기사가 보도됐다.

최 부사장은 여전히 무조건전자 사람들과 연락을 주고받으며 관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러길 한 달, 무조건전자의 왕고집 회장이 다시 만나자며 연락을 했다.

긴 시간을 돌고 돌아 다시 만난 자리. 상대는 10% 오른 220억원을 제안했다. 하지만 최종 협상 결과는 최 부사장의 제안대로 250억원으로 타결됐다. 모두가 안 된다고 생각했던 왕고집 회장과의 협상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최고참 부사장, 그의 협상 노하우는 무엇일까?

<해답> 1.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지지 말라

나본전 상무는 '지금까지 들인 노력이 아깝다'라는 생각에 무리한 요구지만 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 상무가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이유는 뭘까? 바로 '매몰비용(sunk-cost)의 함정'에 빠졌기 때문이다.

만약 당신이 도박을 통해 100만원을 잃었다면, 그곳을 홀가분한 마음으로 빠져나올 수 있겠는가? 많은 사람들은 잃은 100만원이 아까워서 도박에 계속 참여하게 된다. 바로 이런 '본전 생각' 때문에 비합리적인 행동도 계속 하게 되는 것이 매몰비용의 함정이다.

1988년 미국의 거대 식품·담배 업체인 RJR나비스코(이하 나비스코) M&A 경쟁의 사례를 살펴보자. 이 회사가 M&A시장에 처음 나왔을 때 주가는 40달러 수준이었다. 당시 현직 회장으로 있던 로스 존슨(Johnson)이 개인 자격으로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그는 투자은행의 지원을 받아 주당 75달러를 제시했다. 그러자 월스트리트의 M&A 전문회사인 KKR이 주당 80달러를 부르며 인수전에 뛰어들었다.

양측의 가격 경쟁은 에스컬레이트 됐다. 결국 KKR은 애초 시가보다 2.5배 이상 높은 주당 109달러에 인수하게 됐다. KKR은 자존심을 건 싸움에서 승리했지만,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져 터무니없이 비싼 값을 치러야 했다.

만약 일등만건설사가 나 상무의 주장에 따라 왕 회장의 200억원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 당시에는 협상 타결의 기쁨을 누릴 수 있을지 몰라도 뒤에 큰 손해를 봐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매몰비용의 함정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2. 유보 가치를 정하라

가격 협상을 할 때 꼭 기억해야 하는 것이 있다. 바로 '유보 가치(reservation value)'라는 개념이다. 협상학에서 말하는 유보 가치란 '협상 결렬을 선언하고 일어나야 할 시점'이다. 판매자의 경우에는 '적어도 꼭 받아야만 하는 금액'이 되고, 구매자의 경우에는 '지불 가능한 최대 금액'이 된다. 쉽게 말해 자신의 마지노선을 의미한다.

많은 사람들이 협상에 나설 때 '이 정도면 되겠지'라고만 생각하고 협상에 임한다. 하지만 성공적 협상을 위해서는 유보 가치를 정확하게 아는 것이 필요하다. 유보 가치는 크게 두 가지 방법으로 정할 수 있다.

첫 번째 방법은 '객관적인 기준'을 통해 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집값 협상을 할 때라면 공시지가나 주변의 시세, 최근의 거래 가격 등을 기준으로 유보 가치를 정할 수 있다.

두 번째는 '배트나(BATNA·협상 결렬 시 취할 수 있는 최상의 대안)'를 통해 정하는 방법이다. 예를 들어 연봉 협상을 앞두고 경쟁사에서 7000만원에 스카우트 제안을 해 왔다면, 당신은 회사에 적어도 7000만원은 달라고 이야기할 배트나가 생긴 셈이다. 그리고 이것을 당신의 유보가치로 정할 수 있다.

위 사례에서 최고참 부사장은 객관적 기준을 활용해 유보 가치를 정했다. 유사한 규모의 공장 건설에 220억원도 턱없이 부족하다는 전례와 여러 차례 시뮬레이션을 통해 검증된 예산 규모 등을 기준으로 250억원이라는 유보가치를 정한 것이다.

최 부사장은 자신의 마지노선인 유보가치보다 20%나 낮은 금액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현 상황에서 더 이상의 협상은 무의미함을 깨닫고 협상 종료를 선언했다.

3. 제3의 힘을 이용하라

최고참 부사장은 이미 계약 성사가 물 건너갔음에도 공항을 떠나기 전에 무조건전자의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하며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무조건전자에 대한 정보를 모으는 데 힘을 쏟았다.

이는 재협상 기회를 노리는 최 부사장의 협상 노하우였다. 무조건전자가 해외 건설사와 접촉한다는 정보를 입수한 최 부사장은 이를 언론에 자연스럽게 알렸다. 7개월 전에도 '해외 건설사들에만 좋은 공사 기회를 몰아준다'는 비판을 받아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무조건전자는 또 한 번 그런 일이 발생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언론 보도 후 무조건전자의 실무진이 최 부사장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시작했다. 실무진은 협상이 깨진 이후에도 꾸준히 연락을 해온 최 부사장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가 쌓였기 때문. 그래서 넌지시 왕 회장에게 최 부사장과 다시 협상을 해 볼 것을 건의했다.

왕 회장처럼 막무가내인 상대와 협상을 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다양한 방법이 있지만, 언론 등 제3의 힘을 이용하는 것은 자주 큰힘을 발휘한다.

홍콩 정부가 디즈니랜드를 유치하는 과정에서 사용한 협상전술도 이것이었다. 세계적인 테마파크인 디즈니랜드를 꼭 들여오고 싶었던 홍콩 정부. 디즈니랜드는 이를 이용, 다른 나라보다 훨씬 높은 가격의 로열티를 요구했다. 별다른 대안이 없어 끌려 다니던 홍콩 정부는 이 사실을 언론에 알리기로 결정했다. 이미지가 생명인 디즈니랜드에 '강압적인 협상 태도'는 엄청난 타격이 될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 이 예상은 적중했고, 이미지를 걱정한 디즈니랜드측은 홍콩 정부의 요구를 많은 부분 받아들이게 됐다.

4. 손실 회피 심리를 자극하라

최 부사장은 다시 만난 왕 회장으로부터 220억원이라는 금액을 제안받았다. 이 상황에서 보통 사람들은 또다시 가격 협상을 시작하기 마련이다. '우리의 제안은 250억원입니다'로 시작해 '왜 그 정도의 가격이 꼭 필요한지'를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최 부사장의 접근은 달랐다.

그는 왕 회장의 제안을 받고도 가격 얘기는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대신 먼저 일등만건설사와 사업을 추진했을 때 만들어질 멋진 공장의 모습을 화려한 3D 입체 영상을 통해 실감 나게 보여줬다. 태양열 발전을 사용해 유지비를 낮추는 설비, 공장인지 사무실인지 구분하기 힘들 만큼 깔끔한 내부 인테리어 등 왕 회장이 꿈꾸던 것 이상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감탄하고 있던 찰나에 화면은 갑자기 훨씬 열악한 공장 모습으로 바뀌었다. 어리둥절한 표정의 사람들에게 최고참 부사장이 말한다.

"먼저 보여 드린 화면은 저희가 생각한 250억원으로 공사가 진행되었을 때의 모습입니다. 지금 보시는 화면은 무조건전자가 제시한 가격 수준에서 공사를 할 경우의 모습입니다. 어떤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왕 회장은 한참 고민 끝에 최고참 부사장의 제안대로 250억원에 협상을 타결했다.

요지부동이던 왕 회장이 결정을 바꾼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행동경제학에서 '손실 회피 심리'라고 부르는 것과 연관된다. 사람은 한 번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쉽게 놓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이를 증명하는 재미있는 실험이 있다. 만약 당신이 길을 가는데 누군가가 선물이라며 1만원을 준다고 생각해 보자. 그러면서 그는 1만원을 걸고 2만원을 더 받을 수 있는 내기를 제안한다. 당신이라면 내기에 참여하겠는가? 이 상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짜'로 생긴 1만원에 만족하며 내기에 참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은 어떨까? 누군가 당신에게 선물로 3만원을 준다. 공짜로 생긴 돈에 기뻐할 찰나 그가 3만원 중에서 2만원은 다시 돌려달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 가지고 있는 1만원을 걸고 2만원을 되찾을 수 있는 내기를 제안한다. 이 내기에는 참여하겠는가? 실험 결과 많은 사람들이 내기에 참여했다.

'1만원을 걸고 2만원을 더 받을 수 있는 내기'라는 상황은 같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3만원을 받았다가 2만원을 빼앗긴 사람들은 '빼앗긴 2만원을 되찾아야 한다'는 손실 회피 심리를 느꼈기 때문이다.

최고참 부사장도 이를 아주 잘 활용했다. 자신의 제안 금액을 통해 만들어 낼 수 있는 최상의 공장 모습을 먼저 보여줘서 왕 회장에게 '우리의 공장이 최고 수준이 되겠구나!'라는 인식을 심어 놓은 것이다. 그 후에 '그저 그런' 공장 모습을 보여주자 왕 회장은 '아까 봤던 최고의 상황'을 찾고 싶은 욕심이 생기게 됐다.

상대의 심리 상태를 이용하라. 그러면 당신도 최고의 협상가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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